Clips/글

비운의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에 대한 오해.

Yeah-Panda 2011. 2. 21. 20:10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16세에게 억지로 시집간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투와네트라는 이름의 그녀는 훗날 '사치와 무개념'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1. 그녀는 정말로 프랑스를 말아먹은 원흉인가?

- 정답은 no. 그녀가 왕비가 된 후 어느 정도의 사치를 부렸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전체 예

산 중 대략 3%가 왕실 관련 예산이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예산의 10%도 쓰지 않았다. 당시의 프랑스 왕

정의 전체적 액수에 비해 발톱의 때만큼도 못한 액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쓴 돈은 다른 프랑스 역대 왕비들이 사치와 유흥, 도박에 썼던 돈에 비

하면 새발의 피라는 것이다!!!
2. 그럼 왜 지금처럼 사치와 무개념의 대명사로 불리며 욕을 먹을까?

- 문제는 당시 프랑스의 재정이 이미 최악이었다는 거...

당시 프랑스가 처해있던 상황은.....

영국과의 전쟁에서 참패 + 미국의 독립에 무리한 자금 지원 + 세금징수권은 국가가 아닌 징수세금업자들에

게 넘어가버린 상태 = 국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ㅠ.ㅠ

게다가 그 상황에서 기근까지 들었으니...... 나라경제가 잘 돌아갈 리가 없다.

하지만 이런 근본적 배경은 민중들에겐 알바가 아니었고, 당장 화려한 왕실로 분노가 집중되었다. 그런데 루

이 16세의 경우는 사치는 커녕 품위 유지도 아슬아슬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화려한 왕비에게 집중포화가

몰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3. 정말로 "빵이 없으면 케잌(or고기or과자)를 먹으면 되잖아."라는 망언을 했나?

- 전혀;;; 정작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전혀 없다.

원래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에 나오는 말을, 오스트리아년이라며 그녀를 까대던 사람들이 이걸로 유언비어

를 만들어 터뜨렸고, 이것이 다시 혁명단에 의해 강도가 불어나면서 황당한 명언으로 불어나 버린 것....지

못미ㅠ.ㅠ



4. 그 외에 마리 앙투와네트가 미움을 받은 원인은?

-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와는 사이가 나쁜 오스트리아 출신이었고, 사람들은 그걸 트집잡아서 그녀가 오

스트리아의 첩자라는 의심을 가졌다. 물론 그런 오해가 없었어도 그녀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사실 자체로

도 그들은 못마땅해했다.

원래 프랑스 왕조에서 왕비는 '골방에 쳐박혀서 아기나 낳는 기계' 취급을 받았고, 왕들은 이런 왕비를 내쳐

두고 수많은 첩실들을 두었다. 그런데 루이16세는 앙투와네트 외에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아서 첩

실이란 없었으니...이로 인해 루이 16세의 이미지는 황당하게도 '성불구,고자'처럼 변했고,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앙투와네트는 남편 기를 다 죽여놓은 나쁜 년"이라며 뒷다마를 깠다.

- 남편이 무슨 짓을 해도 입닥치고 조용히 애나 낳는 게 미덕이었던 역대 프랑스 왕비들과는 달리, 앙투와네

트는 굉장히 활동적이었고 궁정활동의 중심이나 다름없었다. 서양 복식사에서 그녀가 남긴 업적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결국 이것 때문에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고 함부로 나댄다며 뒤에서 두고두고 까였다.

-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

라 모트 백작 부인이 앙투아네트를 사칭하여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한 사건. 앙투와네트는 이 사

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오히려 앙투와네트에게 라모트 백작부인이 이용당했다

고 오해하고 말았다.

-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루이 16세에게 심리적 문제(…)가 있었기

때문으로 앙투아네트의 책임은 아니다.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흥에 빠진 원인이라

는 설도 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 앙투아네트는 사치도 그만두었고 왕비로서의 위치를 자각하여 왕실에 대한 지지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혁명정부는 원래 그딴 거 모른다



5. 그녀의 죽음

그녀의 사형을 결정한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온갖 혐의가 걸렸다. 재정 낭비, 정부의 부패, 오스

트리아와의 결탁,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백성에 대한 기만, 프랑스를 멸망시키려는 시도, 전쟁 유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아들과의 근친 상간이라는 혐의가 걸렸다. 사실 모든 혐의에 대한 물증은 전혀 없었

다. 사형은 기정 사실이었고 재판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지만, 정의를 자청하는 혁명 정부로서는 아무런 증

거 없이 사형을 선고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결국은 혐의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세뇌된 아들 루이 17세가 '어머니에게 겁탈당했다는 거짓증언

을 하고 말았다.

(왜 루이 17세가 그런 증언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맨 아래 참조)

그녀는 단두대 앞에 설 때까지 품위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근친상간으로 처형될 당시 그녀의 유언은, 실수로 사형 집행자의 발을 밟고서 남긴 '죄송합니다, 무슈. 일부

러 그런 건 아니에요'.

이렇게 의연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이 사형에 대해 정치적인 사형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

다. (그런데 어째 세간에는 이 유언마저 '좀 있으면 죽을 마당에 그런 사소한 일이나 신경쓰는 병신 인증'이

란 식으로 퍼져 있다. 뭐지...)

실제로 사형 전에 그녀가 남긴 글에는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니까요라고 적

혀있었다.

그리고 지금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해는 파리의 생 드니 성당에 남편, 그리고 아들의 심장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

일설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들이 그녀를 어찌나 증오했던지 단두대에 엎드리게 하지 않고 바로 눕혀서(그러

니까, 단두대의 칼날이 내려오는 모습이 그녀에게 똑똑히 보이도록)사형을 집행했다는 설도 있다.



6. 그럼 마리 앙투와네트의 업적은??

- 실제로는 발랄하고 순진하고 동정심 많은 성격이었다. 사교적이었고 만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근사근

했으며,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편견없이 사람을 대했다. 실제로 루이 16세가 사냥을 하다가 실수로 농민을

다치게 하자, 직접 달려가서 그를 간호해주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때 서양 사람들은 구황식물인 감자를 "악마의 음식"으로 오해하고 피했을 때였는데, 마리 앙투와네

트는 감자에 대한 오해를 없애 농민들의 굶주림을 줄이고자 직접 자신의 모자에 감자꽃을 장식용으로 꽂고

다닌 적도 있다.

게다가 프랑스 왕비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빈민 구제에 관심이 많았었다고....ㅠ.ㅠ



7. 최후의 편지

이것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 전날, 시누이인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밤을 새서 쓴 마지막 편지이다. 하지

만 이 편지는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전해지지 못했고, 마리 앙투아네트 사후 반세기가 넘어서야 공개되었다.

- "사랑하는 시누,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지금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은 범죄자들에게 가하는 치욕적인 죽음의 선고가 아니라 당신의 오빠를 다시 만나볼 수 있는 선고입니다. 그

분은 결백합니다. 나도 최후의 순간에 그분과 마찬가지로 처신하기를 바라고 있어요.......(중략)....훗날

을 경계하기 위해서 되풀이하면, 우리들의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중략)....

당신에게 이제 나의 최후의 생각을 털어놓아야겠습니다.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쓸 수

도 없었거니와 재판이 너무나도 빨리 진행되는 통에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습니다.

나는 로마-가톨릭의 사도적인 신앙을 품고 죽습니다. 그것은 내가 성장해왔고 내가 잘 아는 조상들의 신앙입

니다.나는 내게 고통을 주었던 나의 모든 적들의 죄악을 모두 용서합니다. 나는 이제 형제, 자매에게 안녕

을 고하려고 합니다. 내게는 벗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그들의 고통

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내가 지금 죽으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가장 큰 괴로움입니다. 내가 최후의 순간까지

도 그들을 생각했었다는 것만이라도 그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 다정한 시누. 이 편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불쌍한 아이들과 당신을 온 마

음을 다해서 포옹합니다.

당신과 아이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이제는 종교적

인 의무만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므로 아마 사제 한 사람을 임의

로 데려오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전혀 낯선 사람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여기서 편지는 중간에 끊겼다. 형리가 그녀를 데리러 왔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식들과 엘리자베

트가 살아남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아들인 루이 17세는 어린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딸인 마리 테

레즈 샤를롯은 평생 프랑스 혁명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마담 엘리자베트 또한 이 편지를 받지 못하

고 단두대에 올랐다. 여러모로 비극적인, 하지만 죽음 직전의 인간이 남긴 감동적인 편지이다.

참고: 왜 루이 17세는 어머니를 근친상간범으로 몰아세웠는가?

몇 가지 가설이 대두된 바 있는데,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는 바로 루이 17세의 성격과 당시 정황.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들의 성격에 대해 '주변의 부추김이나 자신의 상상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을 지녔다'고 기록한 바 있는데, 왕실이나 귀족 계층에서 태어난 남자아

이들에게서는 흔하게 나타나는 성격이었지만 이러한 성격은 어머니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파멸로 몰아갔다.

재판 과정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사형을 선고할 만한 결정적인 물증이 없자, 혁명가들은 가장 어린 루이

샤를을 꼬드겨 근친상간을 했다고 말하게끔 했다는 것이다.

루이 샤를이 빗자루를 타고 놀다가 고환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는데, 어머니인 왕비와 고모인 엘리자베스 공

주가 이 상처를 돌봐준 적이 있었고, 또 보다 어렸을 때의 루이 샤를이 자신의 생식기를 자꾸 만지고 건드리

는 장난을 치자 이를 마리 앙투아네트가 저지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기억을 토대로 혁명가들은 샤를을 부추

겨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고 말하도록 했다. 오히려 성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7살의 남자아이였

기에 이런 괴랄한 증언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마약까지 동원해서 말 그대로 세뇌를 시켰다고 한

다. 유폐된 도중에도 혁명가를 불러제꼈다고.




[출처]엔하위키 미러

'Clips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에선 강간 , 한국에선 화간?  (0) 2011.03.14
장자연 사건 관련해서.  (0) 2011.03.06
비호감 비  (0) 2010.10.08
Gate Keeping, Agenda Setting. ;  (0) 2010.09.16
기독교가 무서운 이유.  (0) 2010.04.04